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부당합병·회계부정’ 항소심 공판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9월 30일 첫 공판 이후 벌써 네 번째 공판이 열렸다. 2심 재판부는 이달 25일 항소심 변론을 종결한다는 입장이어서, 이르면 내년 초 최종 선고가 내려질 전망이다.
다만 1심에서 무죄를 받으며 ‘사법 리스크’를 털어냈던 이 회장이 또다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반도체 패권 회복, 미래 먹거리 발굴 등 ‘뉴 삼성’ 재건을 위한 ‘책임 경영’ 추진 동력이 힘을 잃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올 3분기 4조원에 못 미치는 영업이익을 거두며 경쟁사에 ‘메모리 최강자’ 타이틀을 내준 삼성 반도체가 흠집 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 회장의 책임경영을 위한 지배구조 혁신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서울고법 형사13부(백강진, 김선희, 이인수 부장판사)는 11일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 등에 대한 항소심 4차 공판을 열었다.
이 회장은 이날 네 번째 공판에도 직접 출석했다. 서울고법에 모습을 드러낸 이 회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곧장 법정으로 향했다.
재판부는 지난 3차 공판에 이어 이날 공판에서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자본시장법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중점적으로 다룬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재판에서 검찰과 삼성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검찰은 이 회장의 승계 목적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진행됐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삼성물산의 사업적 필요성이 목적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주장했다. 또 양사의 합병이 삼성물산 측에 명백히 불리한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삼성측은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합병에 문제가 없었으며, 1심의 무죄 판단이 유지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 근거로 원심이 ‘합병 목적이 승계에만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을 들었다. 또 원심의 주된 판단은 지배구조 개선 목적 뿐만 아니라 사업적 필요성도 있었다는 것인데, 검찰은 사업적 필요성이 없었다는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양측의 입장을 들은 항소심 재판부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배경과 목적이 ‘경영권 승계’에 있는지 등 핵심 쟁점을 집중 심리할 것으로 보인다.
그간 검찰은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 미래전략실(미전실)이 합병을 결정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이 회장의 승계나 지배력 강화가 유일한 목적이 아니기에 전체적으로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며 “이 회장과 미전실이 합병을 결정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당시 검찰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의한 그룹 지배권 승계 목적과 경위, 회계부정과 부정 거래 행위에 대한 증거 판단, 사실 인정 및 법리 판단에 관해 1심 판결과 견해 차가 크다”며 “그룹 지배권 승계 작업을 인정한 법원 판결과도 배치되는 점이 다수 있다”고 짚었다.
검찰의 항소로 사법 리스크가 재점화하면서 이 회장의 뉴 삼성 비전 구체화 제동이 걸린 상태다.
실제로 이 회장은 4년째 이어진 법정 다툼으로 경영에 올인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20년 10월 부당합병·회계부정 재판이 처음 시작된 후부터 올해 2월 최종 선고까지 약 3년 5개월 동안 무려 107차례의 심리가 열렸다. 이 중 이 회장은 총 96차례 직접 출석했다. 이 회장이 사실상 모든 재판에 출석하는 바람에 반도체 경쟁력 제고,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지속 투자 등 굵직한 현안과 관련한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지적이다.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재도약시키겠다는 이 회장의 뉴 삼성 비전 실현도 상당 기간 동안 차질이 불가피했다. 그 사이 삼성전자는 HBM(고대역폭메모리) 패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줬고,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의 분기 영업익은 4조원선 밑으로 추락했다. 더욱이 SK하이닉스가 HBM을 앞세워 ‘분기 영업익 7조원 시대’를 열면서 당장 올 3분기 삼성 반도체는 SK에 메모리 최강자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반도체 위기 타개가 절실한 가운데 내년 초 항소심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사법 리스크에 매달려야 하는 이 회장은 삼성그룹의 수장으로서 경영 행보를 이어가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점쳐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결국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법위)는 이 회장의 책임 경영 실천을 위해 지배구조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삼성 준법위는 지난달 15일 ‘삼성 준법위 2023년 연간 보고서’를 통해 이 회장의 등기 이사 복귀를 촉구했다.
이찬희 삼성 준법위원장은 연간 보고서 발간사를 통해 “삼성은 현재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내 최대 기업이지만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상황의 변화, 경험하지 못한 노조의 등장, 구성원의 자부심과 자신감 약화, 인재 영입 어려움과 기술 유출 등 사면초가의 어려움 속에 놓여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어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외형적인 일등을 넘어 존경받는 일류 기업으로 변화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놓여 있다”며 “경영도 생존과 성장을 위해 과감하게 변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과거 삼성의 어떠한 선언이라도 시대에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폐기하고, 사법 리스크의 두려움에서도 자신 있게 벗어나야 한다”며 “구성원들에게 ‘우리는 삼성인’이라는 자부심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다시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삼성은 최고 경영진의 등기 임원 복귀 등 책임 경영 실천을 위한 혁신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같은달 18일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서초사옥에서 열린 3기 준법위 정례 회의에 앞서 취재진들과 만난 이 위원장은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 회장이 등기 이사로 복귀해서) 책임 경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회장이 삼성그룹을 책임 있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등기 이사 재선임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짚은 것이다.
현재 이 회장은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4대 그룹 총수 가운데 유일한 미등기 임원이다. 이 회장은 과거 국정 농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등기 이사에서 물러난 바 있다. 그러나 미등기 임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책임 경영에 상당한 제약이 따르고 있다.
이재용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와 함게 삼성 내에 ‘제2의 미전실’이 재건돼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이 회장은 항소심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사법 리스크에 계속 대응해야 한다. 이에 삼성의 수장으로서 책임 경영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이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의사결정을 총괄할 컨트롤타워가 복원돼야 한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삼성은 2017년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미전실을 폐지하고, 사업 부문별로 3개의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각 사업을 통합 관리하는 조직의 부재로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일각에서는 현재와 같은 TF 체제가 삼성의 실적 부진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성의 모든 부서가 제각기 따로 분리돼 유기적인 협업이 어려워지다 보니 과거처럼 일사분란함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삼성의 주력 사업이 차질을 빚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재계도 삼성이 통일성 있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컨트롤타워 부활을 논하고 나섰다.
국내 굴지의 여타 그룹들은 대부분 컨트롤타워를 통해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LG의 경우 지주사인 LG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이를 통해 그룹의 의사결정 사안을 계열사에 안정적으로 전달한다. SK도 SK수펙스추구협의회(SK수펙스)를 통해 계열사들이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근 이 회장 앞에는 반도체 주도권 탈환, 미래 먹거리 발굴 시급 등 여러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현재의 TF 체제로는 뉴 삼성 비전을 구체화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 미전실에 준하는 그룹 내 컨트롤타워를 부활시켜 이 회장이 그룹을 효율적으로 총괄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이유다.
준법위 역시 대내외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인 삼성그룹에 컨트롤타워를 재건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 위원장은 “어떤 사안에 있어서 준법위가 정말로 많이 고민하고 있다”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2심 재판부는 내년 1월 말 최종 선고를 목표로 항소심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올 7월 열린 공판 준비 기일에서 2심 재판부는 “11월 25일 항소심 변론을 종결하면 선고일까지 두달 정도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며 내년 초 선고를 내리겠다고 예고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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