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올라 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다. 특히 삼성이 설 연휴 이후 엔비디아에 6세대 HBM ‘HBM4’를 세계 최초로 출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난 몇 년 간 ‘HBM 1등’으로 글로벌 시장을 평정해 온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에 추월을 허용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SK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젠슨 황 엔비디아 CEO(최고경영자)와 전격 회동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HBM4 시장 선점을 위한 각축전이 더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최 회장이 황 CEO와의 만남에서 HBM4 공급과 관련해 심도 있는 논의를 벌였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SK가 HBM4 최적화 단계를 거쳐 이달 중 엔비디아에 본격 납품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10일 재계에 따르면 최 회장은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에 있는 한국식 치킨 가게 99치킨에서 황 CEO와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99치킨은 엔비디아 본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치킨 가게로, 황 CEO의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이날 ‘치맥(치킨과 맥주) 회동’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최 회장은 앞서 한국에서 진행된 치맥미팅에 불참했던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0월 황 CEO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깐부치킨에서 만나 화재를 모았다. 세 사람이 소탈하게 치킨과 맥주를 마셨던 이날 만남은 이른바 ‘깐부 모임’으로 명명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최 회장은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CEO 서밋 행사를 주관하느라 깐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최 회장이 크게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또한 이번 치맥 회동은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 간 파트너십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대화의 장으로도 주목 받고 있다. 업계에선 두 사람이 차세대 HBM4 출하와 관련해 깊은 얘기를 나눈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SK하이닉스는 HBM4 경쟁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SK는 지난해 하반기 HBM4 12단 제품을 본격 양산하겠다는 목표 아래, 같은해 3월 세계 최초로 주요 고객사에 HBM4 12단 샘플 공급을 완료했다.
SK HBM4는 핵심 파트너인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성능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 처리 속도와 전력 효율을 실현했다”고 강조했다.
SK HBM4에 대한 평가는 압도적이다. 황 CEO는 지난해 5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5’에 마련된 SK하이닉스 전시 부스를 방문해 “HBM4를 잘 지원해 달라”고 언급한 바 있다.
SK의 기술 초격차 전략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에서 가장 주목 받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로 부상했다. 경쟁사보다 앞서 HBM4 16단 48GB를 최초로 공개했기 때문이다.
해당 HBM 제품은 업계 최고 속도인 11.7Gbps를 구현한 HBM4 12단 36GB의 후속 모델로, 고객사 일정에 맞춰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I 메모리 리더십을 강화해 온 SK하이닉스는 HBM4 분야에서도 기술 우위와 양산 경험, 고객 신뢰를 바탕으로 주도권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지난달 열린 지난해 4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3세대 ‘HBM2E’ 시절부터 고객사, 인프라 파트너사 등과 원팀으로서 HBM 시장을 개척해 왔다”며 “단순히 기술이 앞선 수준을 넘어, 그동안 쌓아 온 양산 경험과 품질에 대한 고객 신뢰는 단기간에 추월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HBM4에서도 고객사와 인프라 파트너사의 SK 제품 선호도와 기대 수준은 매우 높다”며 “SK 제품을 최우선으로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SK하이닉스는 언제쯤 엔비디아에 HBM4 최종 제품을 전달할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SK하이닉스에 밀려났던 삼성전자가 기술 초격차를 바탕으로 빠르게 약진하며 HBM 주도권을 넘보기 시작했다.
삼성은 지난달 열린 지난해 4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HBM4 기술 경쟁력과 양산 일정, 고객사 평가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HBM4) 개발 착수 단계에서부터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 기준을 상회하는 성능 목표를 설정했다”며 “주요 고객사의 요구 성능이 높아졌음에도 재설계 없이 지난해 샘플을 공급한 이후 순조롭게 고객 평가를 진행해 현재 품질 테스트 완료 단계에 진입했다”고 밝혔다.
이어 “삼성 HBM4는 고객사로부터 차별화된 성능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피드백을 받고 있다”며 “이미 정상적으로 HBM4 제품 양산 투입과 생산이 진행 중이며, 주요 고객사의 요청에 따라 올 2월부터 업계 최고 속도인 11.7Gbps를 구현한 최상위 제품을 포함해 대량의 HBM4 출하가 예정돼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삼성이 이달 중 엔비디아에 HBM4를 납품한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발언은 이미 현실이 되는 모습이다. 최근 삼성이 설 연휴 이후 엔비디아 첨단 AI 반도체 ‘베라 루빈’에 탑재할 HBM4를 공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반도체 업계 전체는 크게 들썩이고 있다. 현재 삼성은 출하 일정에 맞춰 최종 점검단계에 있는 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HBM 1등’ SK하이닉스보다 엔비디아에 HBM4를 먼저 납품한 삼성전자는 차세대 AI 메모리 패권을 최우선으로 거머쥐게 됐다.
이에 전 세계 HBM 시장에서 선도적 지위를 구축해 온 SK의 위상에도 적잖은 흠집이 생겼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안의 위중함을 읽은 최 회장이 이번 치맥 회동을 통해 황 CEO과 SK HBM4 출하와 관련한 막바지 논의를 벌인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업계는 최 회장과 황 CEO 간 치맥 회동으로 SK하이닉스의 HBM4 공급도 한층 탄력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부는 SK가 HBM4 최적화 단계를 거쳐 이달 중 본격 출하하지 않겠느냐고 본다.
비록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에 한발 늦긴 했으나 고객사와의 긴밀한 파트너십과 우수한 생산 능력, 기술 노하우 등을 바탕으로 한동안 HBM 시장에서 우위를 유지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반도체 시장조사기관 세미애널리시스에 따르면 엔비디아가 필요로 하는 HBM4 물량의 약 70%는 SK하이닉스가 공급할 것으로 예측됐다. 삼성전자는 30%였다.
이와 관련해 세미애널리시스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공급망을 차지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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