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연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이 23일 서울 여의도 보험연구원에서 열린 '초위험 사회의 새로운 안전망 : 한국형 포용보험 도입방안과 과제’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백종훈>
다중위기가 일상화된 초위험 사회 속에서 취약계층의 보장공백이 빠르게 확대되는 가운데, 포용보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전문가 목소리가 나왔다.
이 자리에서는 포용보험이 지속 가능하려면 단순한 시혜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유지되는 자생적 시장생태계로 진화해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아울러 취약계층 보호와 보험산업의 지속가능성은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진단도 더해졌다.
보험연구원은 23일 서울 여의도 보험연구원에서 ‘초위험 사회의 새로운 안전망 : 한국형 포용보험 도입방안과 과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발표를 맡은 이재연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초위험 사회의 포용보험과 보험산업의 역할’을 주제로 포용보험의 필요성과 구조적 과제를 짚었다. 포용보험은 취약계층의 보장공백을 메워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장치다.
◇ “전통적 보험원리 흔들려…시장이 채울 수 없는 보장공백 확대”
이 연구위원은 초위험 사회 진입으로 ‘예측·분산·독립성’이라는 전통적 보험원리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후재난, 인구구조 변화, 노동시장 재편, 디지털 격차 등 서로 다른 성격의 위험이 동시다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기존 방식으로는 언더라이팅(인수)하기 어려운 위험이 급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위험들이 개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연구위원은 “고령층의 경우 돌봄공백과 디지털 격차를 동시에 마주할 뿐만 아니라, 폭염과 같은 기후 위험에도 가장 취약하다”며 “여러 위험이 동일한 인구 집단에 중첩되어 작용한다는 점이 오늘날 위험 구조 변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위원에 따르면 기록적인 폭염·홍수 발생 빈도는 과거 50년 대비 2배 이상 늘었고, 온열질환 관련 산업재해는 최근 5년 새 6배나 급증했다. 플랫폼 노동 종사자가 약 88만명에 달하지만 배달 라이더의 유상운송 종합보험 가입률은 26%에 불과해, 4명 중 3명은 배달 중 사고가 나도 적절한 보험 보장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독거노인 돌봄공백률은 22.1%에 달하며, 고령층의 디지털 활용도는 일반 국민의 57.2% 수준에 그치고 있다.
보장공백의 역진적 실태도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났다. 국내 가구당 보험가입률은 90% 이상으로 포화 상태처럼 보이지만, 연소득 2000만원 이하 최취약층의 가입률은 52.1%에 불과하다. 70대 이상 고령층의 건강보험 가입률 역시 28.7%로 급감하는 등 구조적인 역진적 보장공백이 존재한다는 지적이다.
공급 측면에서는 취약계층의 높은 사고위험과 손해통계 부재로 인수 단계부터 가입이 거절되기 일쑤이며, 소득이 불안정한 계층에 맞춘 유연한 상품 라인업도 부족하다. 수요 측면에서도 보험료 부담은 물론 낮아서 청구를 포기하거나 재가입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대다수의 낮은 보험 문해력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 “위험공동체 좁아지면 보험산업 기반도 좁아진다”…업계·정부도 지원 확대
이 연구위원은 포용보험을 추진하는 것이 곧 보험산업이 위험공동체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새로운 위험이 출현할 때마다 해당 위험에 노출된 계층이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면 보험산업이 실질적으로 품을 수 있는 공동체의 규모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위험공동체가 좁아지면 보험산업이 서 있을 입지 역시 함께 줄어든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 업계와 정부가 추진 중인 대응 방식이 구조적 한계에 봉착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동안 업계의 포용보험 활동은 본업과 분리된 봉사·기부 형태의 사회공헌에 가까워 상품 개발이나 인수 역량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경영 여건에 따라 규모가 흔들렸다”며 “상품화 노력 역시 보장 범위가 좁고 소액·단기 상품 위주여서 기후재난이나 고령 돌봄 같은 고위험·장기 영역으로의 확장은 더딘 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유병자·장애인 전용 상품은 가입 문턱을 낮췄지만 실질적인 보장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며 “정부 정책 또한 무상가입이나 보험료 경감 등 직접적인 재원 투입에 의존해, 지원이 끊기면 보장도 함께 중단되는 구조가 되풀이됐다”고 분석했다. 상생보험 역시 공동기금에 기반한 무상지원 형태라는 점에서 동일한 한계를 지닌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연구위원은 포용보험이 지속 가능하려면 데이터 구축, 위험 분담, 수익성 확보, 효율적 전달체계를 갖춘 자생적 시장생태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공급 단계의 손해통계 부재와 낮은 수익성, 전달 단계의 판매 채널 유인 부족, 활용 단계의 낮은 보험 문해력 등 각 단계별 장벽을 해소해 시장이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며 “이와 함께 정부·보험사·지역사회가 역할을 분담하는 민관 협력 체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이 연구위원은 “한국형 포용보험의 핵심 과제는 위험공동체 유지를 통해 사회적 가치와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동반 상승시키는 것”이라며 “포용보험은 공공과 민간이 서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며 함께 작동하는 구조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발표를 마쳤다.
[CEO스코어데일리 / 백종훈 기자 / jhbaek@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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