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부터 현재까지 ‘2030 부산세계박람회(부산엑스포)’ 유치 홍보를 위해 전 세계를 누볐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연말에는 글로벌 경영 행보를 이어 나간다. 반도체 한파, 지정학적 위기 등 산적한 난관을 타개하고, 비상 경영 전략을 모색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일 재계에 따르면, 지난달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엑스포 유치 지원에 나섰던 최 회장은 별도의 휴식 없이 지난달 30일부터 이틀 간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도쿄포럼 2023’에 참석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부산엑스포 유지 지원에 전력투구했던 데서 곧바로 SK그룹 회장으로 위기극복을 위한 글로벌 경영 행보로 전환한 것이다.
도쿄포럼은 최종현학술원과 일본 도쿄대가 2019년부터 열고 있는 국제 학술대회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국제 질서와 과학 기술 혁신, 환경 등 다양한 위기와 기회 요인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최 회장은 지난달 30일 도쿄포럼 첫날 ‘사회 분열과 디지털 전환 속 인간성 함양’을 주제로 개막 연설에 나섰다. 이번 포럼에서 최 회장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국경을 넘은 협력과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20년 간 거의 40개국을 돌아다녔는데, 지정학적 긴장은 어디서나 분명했다”며 “단일 세계 시장의 시대는 거의 끝났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제 각국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 제휴해 각기 규칙과 표준을 만든다”며 “이는 글로벌 가치 사슬에 의존하는 반도체나 전기차 배터리 같은 산업에 특히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세계화의 혜택을 본 한국과 일본 모두 임박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도 했다. 최 회장은 “한·일 양국은 여전히 강한 경제권이지만 스스로 생존할 만큼 크지는 않다”며 “지정학적 분열과 약화하는 성장 동력의 폭풍을 홀로 이겨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한·일 경제 연합체 구성을 제안했다.
그는 “한·일 양국은 민주주의와 법치, 시장 경제 등의 원칙을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나라다”면서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의약품, 신재생에너지 등의 산업에서 강점을 갖고 있고, 합작 LNG(액화천연가스) 터미널, 칩 제조, 스타트업 플랫폼 등 새로 시작할 잠재 영역도 많다”고 설명했다.
도쿄포럼 이후에도 최 회장의 글로벌 경영 행보는 계속된다. 최 회장은 이달 4~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트랜스퍼시픽 다이얼로그(TPD)’에 참석한다.
최종현학술원이 2019년 발족한 TPD는 한·미·일 3국의 전·현직 고위 관료와 석학, 싱크탱크, 재계 인사들이 모여 동북아·태평양 지역 국제 현안을 논의하고, 경제 안보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집단 지성 플랫폼이다.
TPD에 참석한 최 회장은 미국 정·재계 인사들과의 교류에도 나설 전망이다. 또한 12월 12~13일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과 동행할 가능성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최 회장은 2030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홍보 활동에 사력을 다했다. 부산엑스포 민간유치위원회 위원장인 최 회장은 세계 각국을 누비며 부산 알리기에 힘써 온 재계 총수로 잘 알려져 있다. 최 회장이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지난해 5월부터 현재까지 이동한 거리는 약 70만km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지구를 약 17바퀴 경유한 것과 맞먹는 거리다.
최 회장이 부산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은 최근 SK그룹의 중요 행사가 열린 장소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최 회장은 올해 10월 16일 그룹 연례 행사인 ‘2023 SK CEO 세미나’를 파리에서 개최했다. SK가 CEO 세미나를 해외에서 연 것은 2009년 중국 베이징 개최 이후 14년 만이다.
CEO 세미나의 파리 개최는 부산엑스포 홍보 활동의 편의를 고려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 관계자는 “CEO 세미나를 전후해 파리 외에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부산엑스포 유치 활동이 예정된 CEO들이 많은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행사 장소를 파리로 정했다”고 말했다.
최 회장 역시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부산을 알리기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 스스로도 “요새는 땅에서보다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올 6월 발목 부상 당시에는 목발을 짚고 부산엑스포 유치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최 회장의 ‘목발 투혼’은 많은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최 회장은 지난해 5월부터 현재까지 1년 6개월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바쁘게 달려 왔다. 그러나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연말까지도 글로벌 경영 행보를 지속하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최 회장이 글로벌 경영의 고삐를 죄고 있는 것은 SK가 현재 직면한 경영 환경이 엄중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당장, 수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인한 국제 유가 상승 우려,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미·중 패권 다툼, 중국산 전기차 및 배터리에 대한 서방의 견제 등 다양한 지정학 리스크가 산재해 있다.
최 회장은 앞서 지난 10월 열린 CEO 세미나에서 “급격한 대내외 환경 변화로 빠르게, 확실히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며 ‘서든 데스(Sudden Death, 돌연사)’의 위험성을 언급했다. 2016년 6월 확대경영회의에서 처음 언급한 ‘서든 데스’를 7년 여 만에 다시 화두로 던진 것이다.
최 회장은 우리 경제와 기업이 직면한 주요 환경 변화로 △미국·중국 간 주도권 경쟁 심화 등 지정학적 이슈 △AI(인공지능) 등 신기술 생성 가속화 △양적완화 기조 변화에 따른 경기 불확실성 증대 △개인의 경력 관리를 중시하는 문화 확산 등을 꼽았다.
이러한 경영 위기 속에서 SK그룹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전략과 통합·연계된 사회적 가치(SV) 전략 수립 및 실행 △미국·중국 등 경제 블록별 조직화 △에너지·AI·환경 관점의 솔루션 패키지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한편 SK그룹은 다음달 7일 전후로 정기 임원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이미 인사를 마무리한 삼성과 LG처럼 SK에도 세대교체 바람이 불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 인사에서 유임된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과 장동현 SK㈜ 부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등 부회장단의 거취가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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