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 삼성전자가 대내외 불확실성을 타개하고 미래 경쟁력 확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머리띠를 동여맸다. 삼성 내부적으로 AI(인공지능) 메모리인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비롯해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사업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에서 큰 부침을 겪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재협상 및 상호 관세 발효 등으로 향후 사업추진에 비상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그룹 안팎으로 위기 의식이 고조되자 삼성은 사업 부문별로 ‘글로벌 전략 회의’를 열고, 당면 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한 생존 전략 구상에 돌입했다.
17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이날부터 19일까지 사흘 간 주요 경영진과 해외 법인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올해 상반기 글로벌 전략 회의를 개최한다.
삼성전자는 통상 매년 6월과 12월, 두 차례 글로벌 전략 회의를 열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주요 경영진 및 해외 법인장들은 사업 부문·지역별로 현안을 공유하고, 영업 전략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특히 매년 6월 열리는 회의는 하반기에 대비해 연간 실적 목표와 경영 계획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자리여서 더 유의미하다. 이에 이번 전략 회의에 대한 관심은 여느 때보다도 높은 상황이다.
이번 회의는 각 사업 부문별로 열린다. 전영현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장 부회장과 노태문 DX(디바이스경험) 부문장 직무대행 사장이 각각 주재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추후 결과를 보고 받을 것으로 전해졌다.
노태문 삼성전자 DS 부문장 직무대행 사장. <사진=삼성전자>
글로벌 전략 회의의 포문은 DX 부문 MX(모바일경험)사업부가 열었다. 이날 MX사업부는 다음달 선보일 폴더블폰 신제품 ‘갤럭시Z 플립7·폴드7’의 지역별 출시 계획과 판매 전략 등을 논의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루 뒤인 18일에는 DX 부문 VD(영상디스플레이)·DA(생활가전)사업부, 19일엔 전사 등의 순으로 회의를 개최한다. 이들 사업부 역시 상반기 성과를 공유하고, 하반기 사업 전략 발굴 등에 적극 매진할 예정이다.
특히 가전 사업과 관련해 어떤 대책이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달 23일부터 냉장고와 세탁기 등 가전 제품에 사용되는 철강 파생 제품에 50%의 고율의 관세를 부과키로 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미국을 제외한 세계 곳곳에서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로선 50%에 달하는 관세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사업 전략의 재조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MX 부문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DS 부문은 이번 글로벌 전략 회의에서 반도체 경쟁력을 제고할 묘수를 고안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고 있다.
DS 부문은 하루 뒤인 18일 회의를 개최하고, 상반기 영업 성과를 점검하는 한편, 현 위기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한 하반기 전략 등을 집중 토론키로 했다.
현재 삼성 반도체는 연일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반도체 수출 통제 등의 영향으로 HBM 등 메모리 판매가 감소했고, 모바일 등 주요 응용처의 계절적 수요 약세와 고객사 재고 조정 및 가동률 정체로 파운드리 실적도 부진했다.
시스템LSI 사업 역시 주요 고객사에 플래그십 SoC(시스템온칩)를 공급하는 데 실패하며 수익성 창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반도체 사업의 위기는 경영 실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DS 부문의 올 1분기 영업익은 1조1000억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2분기 6조4500억원의 영업익을 기록하며 실적 반등의 신호탄를 쏘는 듯했던 DS 부문은 3분기 3조8600억원으로 반토막 났고, 4분기엔 2조9000억원으로 추락하며 시장에 큰 충격을 안겼다. 올해 들어서도 반도체 영업익이 1조원선을 겨우 넘기며 최근 5개 분기 중 가장 낮은 실적을 기록했다.
삼성 반도체의 추락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도 뒤바꿔 놨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매출 기준 올 1분기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 1위는 36.0%를 기록한 SK하이닉스로 나타났다. 이에 지난 1992년 이후 줄곧 1위였던 삼성전자는 D램 시장의 왕좌를 SK하이닉스에 내줬다. 올 1분기 삼성의 시장 점유율은 33.7%로, SK보다 2.3%p 적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도 SK가 삼성을 앞질렀다고 발표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SK의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은 36%에 달했다. 이에 34%를 기록한 삼성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도약했다. 사실상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메모리 최강자’ 타이틀을 내준 삼성전자는 자존심에 큰 흠집이 났다.
무엇보다 SK에 AI 핵심 메모리인 HBM 주도권을 내준 것이 큰 패착으로 지목되고 있다.
삼성 스스로도 HBM 경쟁력 약화를 시인한 바 있다. 앞서 지난 3월 19일 열린 삼성전자 정기 주주 총회(주총)에서 전 DS 부문장은 “AI 경쟁 시대에 HBM이 핵심 메모리인데, 시장 트렌드를 조금 늦게 읽는 바람에 초기 시장을 놓쳤다”고 인정했다. 위기를 의식한 삼성전자는 “조직 개편, 기술 개발 등 필수 토대를 마련했다”며 HBM 역량을 서둘러 제고하겠다고 공언했다.
최근엔 AI 반도체 공룡 엔비디아의 요구에 맞춰 성능을 더욱 높인 5세대 HBM ‘HBM3E’ 개선 제품을 양산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통해 올 2분기 본격적으로 제품 공급을 확대하고, 늦어도 하반기부터는 HBM3E 12단 제품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자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를 여전히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도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1분기 대만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7.6%로, 1위 자리를 수성했다. 반면 세계 2위라는 위상이 무색하게도, 삼성전자는 7.7%에 불과했다.
더구나 최근 TSMC가 3나노 첨단 공정 가동률 100%를 달성한 것으로 나타나 삼성에 충격을 던졌다. 이는 TSMC가 날로 급증하고 있는 AI(인공지능) 반도체 수요를 빠르게 흡수한 덕분이다.
TSMC를 따라 잡겠다고 공언해 온 삼성전자는 자존심을 구겼다. 지난 2022년 6월 세계 최초로 GAA(게이트올어라운드) 기술을 적용한 3나노 반도체를 양산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던 것이 무색해진 셈이다. TSMC는 삼성보다 반년 가량 늦은 같은해 12월 3나노 생산에 돌입한 바 있다.
메모리, 파운드리 등 삼성 반도체 전 사업이 경쟁력 둔화라는 초유의 사태에 놓인 만큼 전 DS 부문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과 해외 법인장들은 하반기 반도체 사업 로드맵을 재점검하는 동시에 미래 역량 강화를 위한 논의에 온 힘을 쏟을 것으로 점쳐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3년 2월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보조금을 재협상하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도 삼성전자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달 초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미국 ‘반도체 지원법(CSA)’에 따라 미국에 투자한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에 제공키로 한 보조금 일부에 대해 재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전임 바이든 행정부 당시 결정된 CSA에 따른 보조금은 “과도하게 관대해 보인다”며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재협상을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로이터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 정부와 주요 반도체 업체 간 합의된 보조금이 다시 조정될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가 받기로 한 보조금이 줄어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현재 삼성은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파격적인 지원 정책에 힘입어 미 현지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해 생산라인을 구축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미 텍사스에 17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재 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2030년까지 누적으로 약 450억달러를 투자해 미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반도체 생산 공장에 추가로 신규 공장을 건설하고, 패키징 시설과 첨단 연구개발(R&D) 시설을 신축키로 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삼성전자 파운드리공장. <사진=경계현 삼성전자 고문 인스타그램 캡처>
이같은 공격적인 대미 투자에 당시 바이든 행정부도 화답했다. 미 상무부는 지난해 12월 CSA에 근거해 삼성전자에 47억4500만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키로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반도체 보조금을 다시 책정키로 하면서 삼성의 미 현지 반도체 생산 거점 구축에도 제동이 걸릴 위기에 처했다.
DS 부문은 이번 회의에서 현지 동향을 면밀히 살펴보며 향후 반도체 사업에 미칠 영향 등을 따져볼 전망이다. 이를 토대로 CSA에 따른 보조금 재협상 대책 마련에 중점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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