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3년 2월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 1위 대만 TSMC가 독주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추격자인 삼성전자와 인텔의 파운드리 전략에도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인텔은 올해 말 양산 예정인 1.8nm(1nm는 10억분의 1m) 공정의 생산 규모를 줄이는 대신 차세대 공정인 1.4나노 개발에 집중해 초미세 공정 기술을 서둘러 확보하는 데 방점을 찍었 다. 반면 삼성은 선단 공정인 1.4나노 개발 계획을 미루고, 곧 양산을 앞둔 2nm 공정에 역량을 초집중해 파운드리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내비쳤다.
4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1분기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7.6%로, 1위 자리를 수성했다.
반면 세계 2위라는 위상이 무색하게도,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7.7%에 그쳤다.
이에 올 1분기 삼성과 TSMC 간 점유율 격차는 무려 59.9%p나 됐다. 지난해 4분기 59.0%p에서 1.0%p 가까이 더 확대된 것이다.
사실상 TSMC가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구축한 가운데 그간 TSMC를 따라 잡겠다고 공언해 온 삼성전자는 자존심을 구기게 됐다. 한때 TSMC를 견제할 유일한 경쟁자로 일컬어진 삼성 파운드리가 글로벌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 것이다.
비단 삼성뿐만 아니다. 2021년 파운드리 시장 재진입을 선언하며 파운드리 패권 경쟁에 뛰어든 인텔도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다. 올 1분기 인텔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엄혹한 위기 상황에 처한 파운드리 후발 주자들은 최근 생존에 위협마저 느끼는 실정이다. 삼성·인텔은 당장 대책 마련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미국 인텔 본사. <사진=인텔>
먼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내 입지가 매우 미미한 인텔은 초미세 공정 기술 개발에 적극 매진키로 했다.
로이터 통신은 랍부 탄 인텔 CEO(최고경영자)가 주요 고객사를 유치하기 위해 파운드리 사업에서 커다란 변화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만일 새로운 전략이 실행된다면 인텔이 파운드리에서 오랫동안 개발해 온 제조 공정을 고객사에게 더 이상 마케팅하지 않는 방향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3월 취임한 탄 CEO는 지난달께 18A 공정이 신규 고객사에게 점점 매력을 잃고 있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8A 공정은 1.8나노 반도체 생산라인을 의미한다. 현재 가장 앞선 공정 기술인 3nm보다 기술적으로 앞서고, TSMC가 올해 말 생산에 돌입하는 2나노 공정에 버금가는 최첨단 기술이다.
이렇듯 가장 미세화된 공정인데도 불구하고 18A 공정이 고객사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게 탄 CEO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로이터는 “업계 내에서 인텔의 18A 공정은 TSMC의 3나노 공정과 비슷한 수준의 기술로 알려졌다”며 “인텔 내부에서도 18A 제조 공정이 신규 고객사로부터 매력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탄 CEO는 18A 공정 대신 최선단 14A 공정(1.4나노 반도체 생산라인)에 전사 역량을 쏟아 붓는 게 더 낫다고 분석한 것으로 보인다. 1.8nm 공정에서 기술력 부족 등으로 인해 고객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첨단 공정인 1.4nm 개발을 서둘러 미세 공정 기반 고객 수요을 선점하겠다는 복안이다.
탄 CEO는 “TSMC보다 우위를 점할 것으로 기대하는 제조 기술에 더 많은 자원을 집중한다는 게 전략이다”며 “이는 애플, 엔비디아 같은 대형 고객사를 유치하기 위함이다”고 전했다.
인텔의 첨단 공정 기술 개발은 나름대로 순항 중인 것으로 보인다. 앞서 탄 CEO는 올 4월 열린 ‘인텔 파운드리 포럼 2025’에서 “1.4A 공정에 여러 고객사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면서 “일부 외주 제조사들이 현재 개발 중인 우리의 1.4나노를 사용해 테스트 칩을 제작할 계획이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삼성전자>
인텔이 삼성의 기술 초격차 전략을 벤치마킹해 파운드리 경쟁력 강화에 사활을 건 반면, 삼성전자는 되레 기술 초격차 전략에서 한발 물러서는 선택을 내렸다.
삼성전자는 이달 1일 서울 서초구 삼성 금융캠퍼스에서 ‘SAFE 포럼 2025’를 개최했다. 2019년 10월부터 진행된 SAFE 포럼은 파운드리 파트너사들과 최신 기술 동향을 공유하고, 협력을 강화하는 자리다.
예년과 달리 삼성전자는 올해 포럼 규모를 인력과 시간·비용 면에서 모두 축소하고, 비공개로 전환했다.
일례로 지난해만 해도 SAFE 포럼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1000명 이상의 고객·파트너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올해는 장소가 협소한 삼성 관계사 건물로 변경했다.
또 종일 열리던 행사 시간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12시55분까지로 단축됐다.
SAFE 포럼과 매년 함께 진행되던 ‘삼성 파운드리 포럼(SFF)’도 올해는 자취를 감췄다. SFF는 반도체 공정 기술 로드맵을 소개하고, 파운드리 사업 경쟁력을 알리는 삼성 반도체 핵심 행사 중 하나다, ‘SFF 2023’과 ‘SFF 2024’에선 최시영 전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기조 연설에 나서 사업 비전과 로드맵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올해 SFF는 별도 발표 없이 VIP 대상의 내부 만찬 행사로 전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달 초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열린 SAFE·SFF 포럼도 비공개로 진행했다.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사진=삼성전자>
이렇듯 삼성전자가 반도체 관련 행사를 잇따라 축소하고 있는 것은 “사업 내실부터 다지자”는 목소리가 삼성 최고 경영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외 행사를 열어 기술을 홍보하기보다는, 현재 고전하고 있는 파운드리 사업의 기술 경쟁력 확보에 집중하고 고객사 확보에 전념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삼성 내부에 자리 잡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삼성전자는 최근 1.4나노 등 차세대 공정 개발보다는 2나노 등 수율 개선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파운드리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로 삼성은 올해 SAFE 포럼에서 1.4나노 양산 목표를 당초 2027년에서 2029년으로 2년 늦추기로 했다. 대신 올해 말 양산 예정인 2나노 공정의 완성도를 높여 팹 가동률과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현재 삼성 파운드리의 2나노 공정 수율은 수익성 확보 단계인 70%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 초격차 전략에 힘입어 한때 글로벌 시장을 주름 잡아 온 삼성이 스스로 해당 전략을 내려놓기로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단 공정 경쟁에만 몰두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기술력을 제고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이에 삼성은 초미세 공정인 1.4nm 개발에서 한발 물러서는 대신 2nm 공정에 집중해 수율을 안정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이를 토대로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나가는 데 사활을 건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삼성 파운드리는 그동안 첨단 공정 기술 경쟁에만 몰두한 탓에 불안정한 공정 상태에서 다음 세대로 진입하는 일이 반복돼 수율이 낮아지고 고객사 신뢰를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이번 전략 수정으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늘려 나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고 말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