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슈퍼 사이클’의 최대 수혜주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동전쟁 장기화로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동산 원료 의존도가 높은 K-반도체가 첨단 칩 생산에 필수 소재인 헬륨, 브롬 등을 확보하는 데 난항을 겪을 것이란 분석 때문이다.
미국·이란 간 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사실상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가운데, 머지않아 핵심 소재 수급 대란이 촉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글로벌 AI 메모리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SK의 근심은 한층 깊어지는 모양새다.
14일 한국무역협회(무협)에 따르면, 최근 무협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중동 지정학 리스크 확대에 따른 산업 공급망 핵심 품목 영향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이번 보고서를 통해 국내 산업 공급망에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보고서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에서 불거진 ‘중동 지정학 리스크’가 더 이상 단순한 에너지 가격 상승에 국한되지 않고, 원유·LNG를 넘어 헬륨·브롬 등 첨단 산업 소재로 충격이 확산되는 ‘공정 중단형 공급망 리스크’로 전환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중동 지정학 리스크가 장기화하면서 주력 산업의 핵심 소재 공급 차질이 본격화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중간재 공급망 리스크로 확산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한국은 에너지·소재 등을 중심으로 중동 의존도가 높은 수입 집중형 교역 구조를 갖고 있다. 중동으로부터 수입하는 원유·LNG 비중은 절대적이고, 헬륨·브롬 등 첨단 산업 소재 역시 중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동 전쟁에 따른 에너지·소재 수급 불안은 급격히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삼성전자>
보고서는 원유·LNG 등 에너지 원료보다 헬륨·브롬 등 필수 소재에 더 주목했다. 중동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해당 소재의 공급 차질이 발생할 경우, 생산 공정의 안정성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올라 타 역대급 실적을 경신하고 있는 K-반도체에 대한 위기감이 확대되는 모습이다.
헬륨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정밀하게 냉각하는 필수 소재다. 사실상 대체재가 없어 식각(에칭)·증착·포토리소그래피 등 핵심 공정에서 헬륨의 역할은 중대하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헬륨의 핵심 수요자로 꼽힌다.
문제는 헬륨 소재 특성상 오랜 기간 비축하기가 어려워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헬륨은 영하 269℃의 특수 운송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액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특수 컨테이너로 운송된다. 그럼에도 운송 중 증발 가능성이 높아 생산에서 최종재까지의 공급망 안정성이 필수다.
그러나 당장 헬륨 수급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란이 카타르의 LNG(액화천연가스) 생산 거점인 라스라판 산업단지(산단)를 공격하면서 가스 생산 시 부산물로 추출되는 헬륨 생산도 함께 중단됐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달 18일 이스라엘은 이란 남부 최대 가스전인 사우스 파르스를 폭격했다. 이에 이란은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 에너지 시설을 보복 공습했다. 이 과정에서 라스라판 산단 내 생산 시설이 다수 피해를 봤다.
미국과 함께 세계 최대 헬륨 수출국인 카타르는 라스라판 산단의 정제 설비를 통해 글로벌 공급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월간 520만㎥ 규모의 헬륨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란의 공격으로 라스라판 산단 내 생산 시설은 가동을 중단하게 됐다.
이와 관련, 카타르 국영 에너지 기업 카타르에너지(QE)의 사드 알카비 CEO(최고경영자)는 같은달 19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피격으로 회사의 LNG 수출 용량의 17%가 손상됐다”며 “이를 복구하려면 3~5년 걸릴 것이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QE는 한국 등과 맺은 LNG 장기 공급 계약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카다르 LNG 생산 거점인 라스라판 산업단지. <사진=연합뉴스>
삼성·SK의 헬륨 공급망은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해 한국이 수입한 헬륨 가운데 64.7%는 카타르산이었다. 이는 두 번째로 많은 미국(28.6%)보다 배 이상 많은 수준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본거지인 한국이 헬륨 수입량의 3분의 2를 카타르에 의존해 온 만큼, 헬륨 공급 부족 사태에 가장 취약할 것이다”고 진단했다.
다만 일각에선 당장 K-반도체가 큰 피해를 입지 않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성전자 등이 일부 생산라인에 ‘헬륨 재사용 시스템(HeRS)’을 적용해 즉각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 전쟁이 장기화하면 HeRS와 같은 대책도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발 빠른 헬륨 수급 대책 마련이 필요한 셈이다.

강원 삼척시 인근 해상에 떠 있는 LNG선. <사진=연합뉴스>
비단 헬륨 뿐만이 아니다. 브롬 수급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지하 염수, 해수 등에서 회수되는 브롬은 반도체, 의약품, 난연제 등 광법위한 산업에 활용되는 핵심 소재다. 일부 산업에서는 염소나 요오드 등으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반도체 공정에서는 대체 가능성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반도체 필수 소재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중동산 브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이 들여 온 브롬 중 97.5%는 이스라엘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동 전쟁으로 인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브롬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반도체 식각 공정에서는 브롬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브롬과 수소를 혼합해 고온에서 반응시킨 뒤, 불순물을 제거해 고순도로 정제한 브롬화수소를 활용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SK레조냑, 솔머티리얼즈 등 업체들이 브롬화수소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국산보다 수입산이 반도체 공정에 월등히 많이 사용된다. 이에 지난해 한국의 브롬화수소 수입 비중은 △일본 47.1% △미국 23.5% △이스라엘 11.8% 순이었다.
해당 통계를 살펴보면 반도체 식각 공정의 핵심 소재인 브롬화수소를 공급 받는 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브롬화수소 주 수입국인 일본 역시 이스라엘로부터 72.5%의 브롬을 수입한다. 일본이 이스라엘산 브롬을 제때 공급 받지 못할 경우, 브롬화수소 생산에 차질이 불가피해지고, 이어서 한국의 대일본 브롬화수소 수입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위기감이 확산하자 정부는 사태 진정에 나섰다. 산업통상부는 브롬 공급망 우려와 관련해 “현재 브롬화수소는 차질 없이 수입되고 있다”며 “국내 비축 재고도 약 3개월분 이상으로 평상시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진실 무협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번 중동 지정학 리스크는 산지 집중과 해상 병목이 결합한 구조적 공급 충격으로, 단순 다변화 대응에 한계가 있다”며 “특히 반도체 핵심 소재는 원료 및 중간재 공급망이 모두 중동에 연계돼 있어 공급 차질 시 연쇄적 수급 불안이 발생하는 실정이다”고 말했다.
이어 “중동발 충격이 에너지에서 첨단 산업 소재로 확산 중인 가운데, 물량 실물 확보·기술 대응을 연계한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며 “특히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는 계약보다 물량 확보가 더 중요한 만큼, 장기 계약 중심에서 실물 확보 중심으로 전략을 전환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진 선임연구위원은 “이와 함께 필수 소재 공급망 단절 시에도 생산이 유지되는 구조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며 “반도체 공정은 회수·재사용 등 자립형 공정으로 전환하고, 에너지 자립 관련 기술은 국가 안보 필수 기술로 지정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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