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구릉을 덮은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부드럽다. 융단 위엔 윤기를 뽐내며 뻗은 고사리와 알록달록 다양한 식물들이 원시림인양 보는 이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총 1만8200㎡ 규모, 크기만 보면 대형 식물원이지만, 그냥 식물원이 아니다. 실제 화장품 제조에 쓰이는 원재료 식물을 기르는 밭이다.
지난 23일 경기 오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생산공장을 찾았다.
식물원은 부속 화장품 원료 식물원이다. 크기도 크기지만, 공들여 가꾼 식물원보다 더 작은 구릉을 덮은 이끼 하나하나, 고사리 풀잎 한 올 한 올에 정성이 느껴진다.
바로 아모레퍼시픽의 정신이다. “가장 좋은 원료가 가장 좋은 화장품을 만든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창업주인 고 서성환(1923~2003) 회장의 정신이기도 하다. 온실 속 많은 원재료 식물 가운데 동백나무는 이 정신을 기리는 상징이다.
아모레퍼시픽은 고 서 회장이 1932년 개성에 운영했던 ‘어머니의 부엌’이 모태다. 이 상점은 질 좋은 동백기름을 파는 곳으로 유명했다. 지금이야 헤어에센스 제품이 다양하지만, 동백기름은 우리 옛사람들에겐 거의 유일한 헤어 케어 제품이었다.
머리에 윤기를 주는 것은 물론이요, 두피의 가려움증도 막는 효능이 있다.
어머니의 부엌 동백기름은 그 중에서 질 좋기로 유명했다. 고 서 회장은 질 좋은 기름을 얻기 위해 개성에서 자전거로 서울 남대문 시장을 오갔다. 입소문이 나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지난 1945년 아모레퍼시픽의 모태인 ‘태평양 화학’ 설립으로 이어진다.
원료 식물원이 창업정신을 기리는 온실이라면, 옆의 공장은 창업정신을 실천하는 현장이다.
총 22만4400m²의 대지면적에 건축면적 15만7084m². 축구장 30여개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전체를 3등분 한 곳곳의 구조물들 사이의 깔끔한 도로 시설, 1층 한 건물 앞에는 파란색의 스피드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의 조형물이 오는 이를 반긴다.
원료식물원, 물류센터, 아카이브까지 포함해 통칭 ‘아모레 뷰티파크’로 불린다.
아모레 뷰티파크는 2012년 설계부터 시공까지 공조나 위생 등 생산에 관계된 모든 기준을 의약품 공장에 준해 적용했다.
연간 제품 1억1000만개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아모레 뷰티파크엔 올해 2월 말 기준 협력사를 포함해 약 11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크게 공장, 물류센터, 원료식물원 등 3개 파트로 구성돼 있다. 공장 부지는 16만9131.48㎡, 물류센터는 7만2597.44㎡, 원료식물원은 1만8200㎡ 규모다.
보안대를 통과해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보이는 능수벚나무와 은행나무가 원료식물원으로 가는 길을 알렸다. 방문했을 당시엔 꽃이 피지 않았지만, 3월 이후에는 각종 꽃들과 나무 등 식물 총 1620종이 방문객을 반긴다고 한다.
아모레퍼시픽의 탄생을 함께한 동백나무 자리도 아직까진 비어있었다. 실내에서 겨울을 지낸 동백나무는 조만간 실외로 옮겨질 예정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수익과는 상관없이 대지면적의 약 8%(1만8200㎡)을 할애해 원료식물원을 만들었다. 회사 연구원들이 원료를 연구하는 곳이자 사회공헌의 차원의 공간이기도 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회사의 철학을 드러내는 곳으로 의미가 깊다.
능수벚나무를 지나쳐 길을 따라가면 파란색 조형물과 아모레 팩토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팩토리는 아모레퍼시픽의 제품 생산 철학과 생산 스토리를 경험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먼저 1층 팩토리 스테이션에는 화장품 제조, 포장 공정과 이와 관련한 미디어월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아모레 뷰티파크에서 생산되고 있는 화장품도 일부 체험해볼 수 있다.
이어 2층 팩토리 아카이브에서는 설비 체제를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온 회사의 발자취와 공장에서 사용했던 기기들을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3층 팩토리 워크에서는 제조, 생산 과정을 체험해볼 수 있다. ‘설화수’, ‘헤라’ 등 굵직한 브랜드가 탄생하는 생생한 과정을 이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생산 과정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보안상 문제로 사진은 찍을 수 없다. 제조 공정상의 대외비 내용 유출 우려가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창문을 통해서 살펴본 생산 현장에선 수십여 개의 라인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약 8~10m로 보이는 라인 한 개당 근무하는 인원은 대략 2~3명 정도다.
생산 현장은 이미 로봇을 통한 자동화가 상당히 이뤄진 상태였다. 화장품 내용물을 병에 담고 이 병을 다시 패키지 상자에 담고 상자를 접는 것까지 모두 로봇이 했다. 또 모든 라인은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여 진공 상태를 유지했다.
10여년 전 공장을 열었던 초기에도 자동화가 일부 이뤄져 있었지만, 이 때와 비교하면 라인 한 개당 근무하는 인원이 절반 수준으로 축소됐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무거운 플라스틱 상자를 옮기는 것 또한 자기 위치를 스스로 찾아가도록 설계된 로봇이 해내고 있었다.
또 3층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도 실제 물류센터 내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류센터 또한 로봇이 박스 여러 개를 싸는 작업을 진행하는 등 자동화가 진행된 모습이었다.
아모레퍼시픽은 최근 매년 로봇 엔지니어링 관련 채용을 진행할 정도로 내부에 로봇 인재를 확보하는 데도 노력하고 있다.
오산 공장은 아모레퍼시픽의 정신과 역사가 살아 숨시는 곳이다. 과거 크림류를 섞을 때 쓰던 믹서기 등 옛 기구들이 전시돼 아모레퍼시픽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정신을 기리는 동백나무와 어울려 ‘왜 아모레 퍼시픽이 한국에서 세계적 화장품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말 없이 증언하고 있다. 기계 하나하나에 고 서 회장의 정신과 땀이 묻어 나는 듯 싶다.
고 서 회장은 10대 시절 개성에서 매일 새벽 5시에 출발해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기름을 구한 뒤 밤 10시 넘어 어머니 상가에 기름을 전하고 쉴 수가 있었다. 서울 가는 길은 혼자 달린다고 해도 귀가길은 남대문 시장에서 구한 기름을 자전거에 싣고 움직여야 했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고 서 회장이 도시락을 6개나 들고 다녔다고 증언했다.
집념의 고 서 회장은 지난 1945년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설립한다. 그 뒤 70여년이 지난 현재 아모레퍼시픽은 연 매출 4조원대, 재계 순위 50위권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아모레뷰티파크가 전하는 ‘동백나무의 정신’, 코로나팬데믹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악화된 경영환경 속에 고군분투 하고 있지만 ‘명품기업’ 아모레 퍼시픽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 없는 이유다.
한편 아모레 뷰티파크 내 아모레퍼시픽 아카이브에서는 창업자인 고 서 회장 탄생 100년을 맞아 오는 12월27일까지 <아모레퍼시픽 서성환 100년Ⅰ1924-2024> 기획전을 개최한다.
[CEO스코어데일리 / 김윤선 기자 / yskk@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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