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벨트’ 야당 싹쓸이, 한국판 반도체 지원법 나오나…“투자 인센티브 정책 지지부진”

수원·용인·화성·평택 등 반도체 벨트서 야당 압승
반도체 지원책 내놨지만 실질적 역량 제고 계획 부재
미국·유럽·중국, 대규모 보조금 통해 경쟁력 확보 사활
산업계, K-반도체 역량 강화 파격적 혜택 시급 주장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화성캠퍼스. <사진=삼성전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지난 10일 막을 내리면서 선거기간 동안 각 당별로 제시했던 공약들이 현실화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특히 날로 첨예해지는 반도체 패권 다툼 속에서 K-반도체 경쟁력 제고를 위한 산업계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산업계는 제22대 국회가 정파를 초월해 K-반도체의 재도약을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 정책을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수도권내 핵심 요충지로 지목됐던 이른바 ‘반도체 벨트’에서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됐다. 반도체 벨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업체들의 생산 거점이 위치한 곳으로. 경기 수원, 용인, 화성, 평택 등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민주당은 반도체 벨트에 걸린 총 16석 중 15석을 휩쓸었다. 수원에선 김승원(갑), 백혜련(을), 김영진(병), 김준혁(정), 염태영(무) 등 민주당 후보가 모두 당선됐다. 또한 4석이 걸린 화성도 송옥주(갑), 권칠승(병), 전용기(정) 등 민주당 후보가 3개 지역구에서 수성했고, 화성 을도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의 차지로 돌아갔다. 평택에서도 홍기원(갑), 이병진(을), 김현정(병) 등 민주당 후보가 승리했다.

용인 역시 이상식(갑), 손명수(을), 부승찬(병), 이언주(정) 후보가 4곳 모두를 차지했다.

반도체 벨트에서 누가 당선됐는지가 관심을 받는 것은 K-반도체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각국은 반도체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자국 반도체 경쟁력 키우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도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초 정부는 반도체 벨트의 허리에 해당하는 용인 갑 지역구에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정부의 계획에 화답하듯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K-반도체 업체들은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고, 생산 설비 구축을 위한 준비에 돌입한 상태다.

삼성은 용인 클러스터 구축에 2047년까지 총 360조원을 투자키로 했다. 화성·기흥-용인-평택 등 경기 남부권을 연결하는 ‘반도체 삼각 편대’를 구축해 현재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뿐만 아니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극대화한다는 구상이다.

2023년 9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현장을 둘러 보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오른쪽). <사진=SK>

SK도 2045년까지 122조원을 투자해 용인 클러스터에 반도체공장 4곳을 짓는다. 지난해 6월 부지 조성 작업에 돌입한 SK는 내년 3월 첫 번째 팹을 착공해 2027년 5월 준공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용인 클러스터 구축에 사활을 걸었다. 지난해 9월 직접 현장을 찾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SK하이닉스 역사상 가장 계획적이고도 전략적으로 추진되는 프로젝트다”며 “클러스터 구축 성공을 위한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이렇듯 정부 주도 하에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첫 발을 내딛긴 했으나 정작 K-반도체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실효성 높은 정책이 부재하다는 비판에선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일례로 당장 올해 말이면 국내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 기한이 만료된다. 현행 제도에 대한 추가 입법 보완이 없을 경우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반도체 투자 위축이 불가피한 셈이다. 이 외에 인센티브 지원책 등 반도체 육성 정책은 전무하다.

우리나라와 달리 주요국들은 파격적인 혜택을 담은 정책을 앞세워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최선두에 있는 곳은 미국이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2022년 8월 ‘반도체 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을 발효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 현지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는 반도체 업체들에 향후 5년 간 약 527억달러(약 72조409억원)의 보조금 지원을 골자로 한 반도체 지원법에 서명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미국 내 반도체공장 설립 지원에 약 390억달러(약 53조3130억원), 연구개발(R&D)·인력 육성 지원에 약 132억달러(약 18조444억원) 등이 투입된다. 또 향후 10년 간 설비 투자 비용의 25%에 해당하는 세액 공제 혜택도 제공키로 했다. 세제 혜택 규모는 무려 약 240억달러(약 32조8080억원)에 달한다.

미 정부의 매력적인 인센티브 덕분에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앞다퉈 대(對)미국 투자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1위 대만 TSMC는 대미 투자 규모를 기존 400억달러(약 54조6800억원)에서 650억달러(약 88조8550억원)로, 1.6배 이상 늘리고, 2030년까지 미 애리조나주에 세 번째 공장을 추가 건설하기로 약속했다.

이와 관련해 미 상무부 관계자는 “650억달러라는 투자 규모는 대미 외국인 직접 투자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3년 10월 19일 삼성전자 기흥·화성캠퍼스를 찾아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건설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도 미국에 수십조원 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앞서 2021년 삼성은 미 텍사스주에 170억달러(약 23조2390억원) 규모의 파운드리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재 건설 공사를 진행 중이다.

또 현재 건설 중인 미 텍사스주 반도체공장 외에도 향후 20년 간 1920억달러(약 262조4640억원)를 투자해 11곳에 반도체공장을 건립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렇듯 글로벌 반도체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들이 미국에 과감히 투자키로 한 데에는 업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천문학적 규모의 보조금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다. 유럽연합(EU)도 역내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 총 430억유로(약 63조1425억원) 규모의 보조금 및 투자를 지원하는 ‘EU 반도체법(Chips Act)’ 시행에 합의했다. 일본도 반도체 설비 투자의 40%가량을 보조금으로 지원키로 했다. 대만은 반도체 업체들의 R&D 세액 공제율을 15%에서 25%로 늘리는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반도체 후발 주자로 통하던 중국도 글로벌 시장 내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보조금 지원에 힘입어 첨단 반도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주요 외신들은 중국 화웨이가 비밀 반도체공장을 짓고 있다고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를 인용해 보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SIA의 주장을 인용해 “화웨이가 지난해부터 자체 반도체 생산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SIA에 따르면 화웨이는 중국 정부와 선전시로 부터 약 300억달러(약 41조25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당국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화웨이는 최소 두 곳 이상의 반도체공장을 인수하고, 새로운 공장 3개를 더 건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화된 반도체 기술 역량은 중국이 자체적으로 AI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 이천공장. <사진=SK하이닉스>

미국, 유럽 등 경쟁국과 후발 주자인 중국이 반도체 역량 제고에 전력을 다하면서 그동안 선두 자리를 지켜 온 K-반도체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점차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반도체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대규모 자금 지원, 세제 혜택 등을 앞세운 경쟁국의 견제에 이어 중국의 반도체 굴기도 심화하면서 K-반도체가 큰 위협을 받고 있다”며 “경쟁 우위를 서둘러 갖추지 못하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K-반도체의 위상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에 제22대 국회에 거는 기대가 어느 때보다도 높다. 반도체 업계는 하루 빨리 K-반도체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인센티브와 실질 정책을 마련해줄 것을 고대하고 있다.

반도체 벨트를 휩쓴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 앞서 수원과 용인 등 경기 동남부 지역에 ‘반도체 메가 시티’를 육성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반도체 등 국가 전략 기술 투자 세액 공제 일몰 기한을 연장하고, 국가 전략 기술 R&D 장비와 중고 장비 투자에 세액 공제를 적용하기로 했다.

다만 직접적인 반도체 역량 제고 계획이나 지원 규모 등이 마련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한편 최근 정부는 현 반도체 경쟁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실효성 있는 인센티브 등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제22대 국회와 정부와의 협치 가능성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달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반도체 현안 점검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AI(인공지능)와 AI 반도체 분야에 2027년까지 9조4000억원을 투자하고, AI 반도체 혁신 기업의 성장을 돕기 위한 1조4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경쟁은 산업 전쟁이자 국가 총력전이다”며 “전시 상황에 맞먹는 수준의 총력 대응 체계를 갖추기 위해 반도체 산업 유치를 위한 투자 인센티브부터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강조했다.

[CEO스코어데일리 / 오창영 기자 / dongl@ceosc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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